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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의 관리는 '리더십과 협력'조선시대 국왕 경호에서 배우는 보안
김승희 객원기자 | 승인2016.07.04 15:29

끼이익!
왕의 침전 영역으로 가는 길목, 향오문의 오른쪽이 둔탁한 소리를 이끌며 열렸다. 보슬비가 내렸던 그 밤의 둥글었던 달이 차츰 부피를 줄여 모습을 감춘 밤이었다. 구군복을 갖춰 입은 제운이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중략)

향오문 안에는 선전관청(宣傳官廳)에서 나온 당상관이 제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운은 그에게 인사를 올린 뒤 보초를 서고 있던 갑사들의 인사를 받았다. 당상관이 품속에서 밀지(密旨)를 꺼내어 건넸다. 제운이 내용을 확인했다. 왕과 운검만이 읽을 수 있는 선과 점의 부호로만 이루어진 암호로, 오늘밤의 군사 암호구와 왕이 잠자게 될 곳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제운이 밀지를 세워둔 화로 속으로 넣어 태우자 당상관이 속삭이며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입궐하였군.”

“쉬었습니다.”

“원, 사람도 빡빡하기는. 자네가 궐을 비운 동안 암호가 늘 그런 식이었다네.”

오늘의 군사 암호구는 고일 (孤日), 외로운 태양이었다. 제운은 이 암호가 왕의 현재 심정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운은 훤의 독촉에 못 이겨 보름여 동안 월을 찾아 백방을 돌아다녔다.(중략)

제운은 밀지에 적혀 있는 장소로 갔다. 왕의 침소는 경호와 풍수, 역학으로 인해 매일 밤 달라졌다. 왕의 대침전인 강녕전, 동소침전인 연생전, 서소침전인 경성전 안에는 모두 합하면 수십 칸에 달하는 방들이 있는데, 이 많은 방들 중 왕이 그날 밤 잠드는 곳을 아는 사람은 방을 정해 주는 관상감의 교수 세 명과 당직을 서는 내관 몇 명, 궁녀 몇 명, 그리고 운검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왕이 정확히 어디에서 잠든 줄도 모르고 빈방들을 지켰다. 세 곳의 침전 전체는 선전관들과 내금위 부대가 경호했다. - 역사소설 ‘해를 품은 달‘1권, P198~P199( 정은궐 글, 파란펴냄 )

소설의 한 단락이지만 실제로도 조선시대에 궁궐은 최고 권력자인 왕이 거처하는 장소이며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핵심기관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위를 위해 경비에 매우 철저하였다. 왕이 군사권을 장악하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면 언제든지 반란의 무리들이 침범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한국중앙연구회 지음, 돌베개 펴냄)’ 에서는 당직이나 숙직자 중에 근무태도가 태만하거나 출입 절차를 거치지 않고 드나들다 적발되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통금시간에는 서로가 아군임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로 군호가 사용되었는데, 이 군호는 거의 두 글자로 이루어졌다. 병조의 당상관은 매일 새로 정한 군호를 단자에 밀봉하여 신시(申時, 오후 3시부터 5시)에  병조 낭관을 통해 왕에게 결재를 받았다. 군호는 왕실의 안위가 달린 일급보안이었기 때문에 이를 당상관이 다른 사람에게 대필하거나 근무 중에 서로의 군호가 통하지 못할 경우 파직될 만큼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내부자의 조력에 의해 흔들린 존현각( 尊賢閣 ) 자객 침입 사건

1777년 7월 28일 (정조1년) 밤에 국왕이 거처하던 경희궁 존현각에 두 명의 자객이 침입했다.
그들은 지붕의 기왓장을 들어내어 왕의 숙소로 들어가려다 실패하고 도주한지 10여일 만에 체포되고 말았다.

범인은 노론의 영수인 홍계희의 아들과 손자인 홍술해가 주도하고 강용휘라는 포교(포도청 소속으로 범죄자를 잡는 일을 맡아하던 벼슬아치)와 천민출신의 장사 전홍문을 돈으로 매수하여 정조와 홍국영을 사사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강용휘의 조카 강계창과 궁중나인으로 있던 강용휘의 딸 월혜 등 궁안의 근무자들까지 포섭시켜 쉽게 궁궐에 출입할 수 있었고 왕의 처소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의 암살 시도사건 만큼 경비가 삼엄했던 궐에 내부자들이 조력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조선시대의 국왕들은 자신의 정통성이나 사대부들과의 정치적인 견해로 대립을 하다보면 반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독살이나 반역을 도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왕이 이동하는 장소나 잠드는 침전, 먹는 음식 등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하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되는 보안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존현각 자객 침입사건은 증명하였다. 넓은 궐을 지키다보면 한 두 사람만으로 조직의 기밀이 지켜지기 어렵고 몇몇 사람의 이탈로 삼엄한 보안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소홀함으로 엄청난 비극을 불러 올 뻔 했던 것이다.

통신시설이나 물리적인 보안 시스템이 없었던 시대에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과 상대의 움직임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되었지만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더불어 무엇보다 조직원들과의 신뢰와 협력이 더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신뢰로 쌓은 협력자들

조선왕조에서 누구보다 독살설에 시달렸던 왕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정조를 지목할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노론세력은 물론 외척까지도 모두 적으로 두어야 했다.

가까스로 왕위에 즉위된 정조는 계속되는 반대파의 저항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자리에서도 옷을 입고 있었고 늘 곁에 칼을 두고도 깊은 잠을 취하기 못했을 만큼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위치에 있었다.

존현각 사건이후로 몇 차례 신변의 위협을 받던 정조는 위급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 무예를 연마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시키고 함께 일할 정치적인 파트너가 필요했다.

우선 기존의 군사조직인 5군영이 당쟁의 도구로 전락하여 유명무실해지자 장용영이란 부대를 신설하여 30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병력을 키워 세력을 넓혀나갔다. 장용영의 장교 백동수와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무예신보, 무예보통지 (1790년 정조 14년)를 편찬하여 이 책으로 장용영의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힘썼다.

규장각(奎章閣)을 만들어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고 성과를 토대로 많은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정약용과 같은 젊은 학자와 권력의 주변부에 머물었던 남인 출신의 체재공과 서자출신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당파나 신분에 상관없이 등용했다.

정조는 주위의 모두가 정적이었지만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끝까지 아끼고 보살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개혁정치를 펼쳐 나갈 수 있었다. 비록 미완의 개혁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상황에 안주하기 않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던 군주의 실천 과정과 노력은 결과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본받아야 할 것이다.

객원기자 김승희

 

김승희 객원기자  seunghikim@hanmail.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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